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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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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 약력

    숙명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대학 서양화 전공 박사 졸업 [프로젝트] 2025 인천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사업. 시각. 인천문화재단 [개인전] 개인전 16회 (문화재단 후원 개인전 1회, 공모 개인전 1회, 초대 개인전 9회 등) [그룹전] 경기문화재단 지원사업, 고양 어울림누리 미술마당2, 지지향, 아트레온 갤러리, 서울대학교치과병원, 청파 갤러리, 김세중 미술관, 슈페리어 갤러리, 예술의 전당, 동대문 디자인프라자 (DDP), 벡스코 BEXCO, 뉴욕 한국문화원, 상하이 한국문화원, 문화역 서울 284, ASIA HOTEL ART FAIR (AHAF), Scope Miami Art Fair, Miami, 한국공예 디자인 문예진흥원, 서울 추모갤러리, 전주 우진문화공간,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갤러리, 한전 아트센터 갤러리, 해운대 아트갤러리, New York Town Hall Museum, 구보타 갤러리, 문화일보 갤러리, 덕원 갤러리, 공평 아트센터 갤러리 등 [수상] 2016 Call For Artists 2016 New York 선정, 뉴욕 2016 New York Contemporary @ Shanghai 선정, 상하이 2015 HIDDEN ARTISTS 100 선정, 서울 2015 아시아 태평양 미술대상전_금상, 서울 2014 ASYAAF 선정작가, 서울 2014 전국대학원 미술공모전_특선, 서울 2014 대한민국 선정 작가 선정, 서울 [아트페어] 2022 NET FAIR ART DMZ, 라이브러리스테이 지지향, 경기 2021 ASIA HOTEL ART FAIR (AHAF), 서울 2017 Scope Miami Art Fair, Miami 2017 Context New York, New York 2017 ART BUSAN 2017, 부산 2016 MANIF Seoul 2016, 서울 2016 ART BUSAN 2016, 부산 2016 Affordable Art Fair Seoul, 서울 [기타 경력] 중학 국어 국정 교과서 그림 現 숙명여자대학교 출강
  • 작가 설명

    [작가노트] 본인은 《Beyond What You See》라는 테마로 10년 이상 회화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이는 제목 그대로,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회화적으로 해석한 작업들로 구성됩니다. 일상의 사물이 단지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이라는 감각과 사유 그리고 사물의 표면 너머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탐구하며 작업을 합니다. 익숙한 대상을 새롭고 낯설게 바라보는 경험을 선사하고자 합니다. 하찮은 사물인 비닐을 회화의 전면에 아무런 꾸밈없이 단독으로 등장시켜 그것을 시간과 존재의 흔적을 응축한 매개체로 전환시키고 있습니다. 회화적 번역과 연출을 통해 한낱 비닐인 사물은 보이는 것 너머, 즉 일상의 것과 다른 감각으로 우리를 매혹하는 사물이 됩니다. 무언가를 품었던 흔적인 주름은 단순히 부재로 남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빛과 공간 그리고 숨겨진기록의 시간으로 인하여 사물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물의 낯선 매혹 속에서 존재의 흔적, 시간의 결 같은 사물의 실재성에 끌리는 경험으로 유도합니다. 관객이 사물에 대한 틀에 박힌 경험에서 벗어나, 전혀 예상치 못한 미적, 예술적 대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경험을 제공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습니다. 일상적 사물의 미적 매혹과 함께 사물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인 사유로 나아가는 시간을 향유하고 그런 경험을 통해 일상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사유를 관객에게 제공하는 데 작업의 또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오늘날 예술이 관객에게 줄 수 있는 중요한 미적 역할과 가치라는 생각을 합니다. [평론] 사물의 깊이를 응시하는 회화 조경진 (연세대학교 연구교수, 미술비평) 장호정은 줄곧 ‘보이는 것 너머 Beyond What You See’를 테마로 작업해 왔다. 스펙터클한 이미지가 넘쳐나고, 보이는 것조차 정보로 소화하기 어려운 과잉 이미지의 시대에, 그의 시선은 언제나 보이는 것 너머로 향해 있었다. 그가 말하는 ‘보이는 것 너머’, 정말로 직접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랑의 무수한 행위들이 있어도, 사랑이 따로 가시적 사물로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존재나 존재의 많은 양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은폐된 존재를 탈은폐하라’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예술론의 언명이나,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게 하라’는 들뢰즈의 예술적 요청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예술은 늘 보이지 않는 것들, 이른바 실재를 지향해 왔다. 세계나 현실의 실재건, 마음의 실재건, 사물이나 현상의 실재건, 아니면 형이상학적 실재건 상관 없다. 하지만, 예술의 숙명은 그 일을 필연적으로 보이는 것, 감각적 형식을 매개해서만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니, 장호정도 보이는 것 너머를 보여주고, 그것으로 우리의 시선과 감각을 돌리기 위해, 그것에 대한 체험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해, 보이는 것을 통과하는 방식을 경유한다. 그런데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 것’조차도 특별하지 않다. 감각적 충격을 주거나, 미적 현상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거나, 시선을 사로잡는 휘황찬란함도 없다. 그는 감각적 자극이나 인상으로 관람자를 유혹하는 방식을 의도적으로 택하지 않는다. 그가 연작에서 가장 많이 그려온 것은 다름 아닌 비닐이다. 이 사물은 현대 일상에서 물건을 담거나 포장하는 기능 외에는 거의 의미나 중요성을 부여받지 못한다. 산업 사회에서 생산된 수많은 물질 중에서도 가장 싸고 흔한 물건이며, 미적 감성을 고려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기에, 감흥을 일으키는 대상이 되기도 어렵다. 비닐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만, 지속 불가능한 소비 문화를 상징하며,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대부분은 단 한 번 쓰이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그야말로 가장 하찮은 사물 중 하나인 셈이다. 도리어, 그는 이 보잘 것 없는 대상을 회화의 소재로 선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존귀한 사물처럼 화면 전면에 꽉 차게 해 그 사물이 우리의 시야 전부를 차지하도록 만든다. 비닐이 무슨 예술이 되겠는가. 그것을 가져왔다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비닐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거기에서 어떤 경험을 끌어내는지, 그래서 비닐이 하찮은 사물이 아니라, 다른 무엇으로 보이는지, 우리가 우리 주위의 사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게 되는지, 결국,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궁극에 그것이 우리를 지금 보이는 너머로 우리를 데려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정수가 그의 작업을 통해 발휘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예술가로서 장호정의 역량이 있다. 그는 여러 사물 중 하나도, 다수의 비닐 중 하나도 아닌, 단 하나의 비닐을 독립적으로 화면에 배치한다. 그 비닐은 마치 우주에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다. 이로써 우리는 오직 그 대상 하나와 대면하게 된다. 그 대면은 물리적 거리감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회화에서 사물들은 공간의 어딘가에 배치되지만, 장호정의 비닐은 화면의 가장 전면, 거의 물리적 표면 위에 놓여 있다. 관람자는 사실상 그것과 직면하게끔 요구받는다. 이러한 강렬한 대면을 유도하기 위해, 그는 또 다른 형식적 장치를 마련한다. 바로 비닐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의 공간이다. 그는 비닐 외의 어떤 배경이나 맥락적 요소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연출은 비닐이 속했던 모든 환경과 관계를 제거하고, 오직 사물 그 자체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다. 그것은 모든 우연성과 관계들의 소란스러움을 걷어낸 순수한 응시의 장면이며, 이 장면 속에서 비닐은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우리 앞에 선다. 비닐이 다시 우리의 일상 맥락에서 읽히는 순간, 그 비닐은 일상의 이야기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의 일상 공간에서 비닐은 한 번도 진짜 비닐이었던 적이 없다. 그것은 그저 우리의 필요와 삶의 물질적, 경제적 조건에서, 바로 그 맥락에서 존재했던 객체일 뿐이다. 그것은 공장과 마트에서 놓인 비닐이고, ‘우리에게 비닐’이었다. 하이데거에게 고흐의 구두가 철저히 농부의 세계나 대지에 연관된 사물, 그러한 사물의 존재였다면, 반대로, 장호정은 사물의 존재 연관의 맥락을 완전히 끊어내고, 오로지 이 사물이 그 사물의 자율적 실재성으로 존재하도록 한다. 그 사물은 이제 완벽한 진공 속에 머물며, 유일하게 우리 자신과만 대면한다. 비닐은 오직 그 자신만을 말하며, 그 자신으로만 우리를 마주한다. 우리는 거의 매일 사용하는 비닐을 이렇게 만나 본 적이 없다. 장호정의 작업은 우리가 비닐이라는 이 사물을 이런 방식으로 대면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사물에 대한 태도와 시선, 감각의 초점을 이동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존재한다. 그의 작업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그것은 예술의 궁극적 작용, 곧 은유를 발생시킨다. 이 은유는 화면에 배치된 여러 미적 속성으로부터 출현한다. 진공과 탈맥락의 구성은 존재의 실재적 영역에 대한 은유이고, 비닐의 투명한 성질은 모든 맥락에서 물러나 있는 실재를 들여다보는 투명성의 은유이며, 마지막으로 비닐의 주름은 그것이 단지 개념적이거나 추상적인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다른 사물들과 함께 삶을 살아온 구체적인 존재임을 보여주는 은유다. 그 주름은 비닐의 역사이자, 곧 우리 자신의 삶의 주름진 서사에 대한 은유이다. 장호정에게 확대된 비닐의 무수한 주름은 “기록된 시간이자 인생의 모습”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무형의 공기와 빛을 머금은 비닐엔 삶의 순간이 남겨져 있고, 그런 흔적은 우리를 영원으로 인도합니다. 관객은 사물의 표면에 새겨진 흔적 속에 어른거리는 사물의 존재와 시간을 되짚어 볼 수 있을 겁니다.”(작가노트, 2025) 사물의 깊이를 대면하게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한낱 하찮은 비닐이 아니라, 아름답고, 심지어 숭고한 대상으로 떠오른다. 사물이 이렇게 다르게 나타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보이는 것 너머’의 존재와 실재성을 마주하게 되며, 장호정은 이를 포착하고 경험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미적 형식을 창안해 왔다. 하먼을 위시한 객체 지향 철학, 사물 철학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통찰 중 하나는 사물은 항상 우리가 생각하거나,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전제를 따르지 않더라도, 우리는 지금 현재 내 앞의 사물들이 지금 있는 것보다 더 큰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잠재성은 다른 상황, 사건,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즉 무수한 배치 앞에 열려 있다. 장호정은 자신의 회화를 통해 이 근본적인 전제를 몸소 실행해 왔다. 그는 그저 철학적 전제나 명제가 아니라, 감각과 감성으로, 그리고 미적 형식으로 우리가 그러한 직접 그 이상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정신에 자유로운 활력을 부여해 왔다. 그의 미적 실천과 예술적 탐색은 이제 다른 사물들, 다른 상황들로 확장되고 있지만, 사물 너머, 보이는 것 너머의 차원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꽤나 감각적인, 표면에서 반짝거리는 빈 봉지의 유혹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장호정의 작업은 크게 세 단계를 거친다. 상황 연출하기와 사진으로 기록하기,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진 그대로 캔버스에 확대해 그리기. 이 가운데 앞의 두 단계는 말 그대로 과정으로 남겨지고, 그 과정은 회화에서 최종적인 결과물로 제시된다. 하나의 과정 속에 연출과 사진 그리고 회화가 모두 들어있고, 최종적인 회화를 위해 연출과 사진이 동원되는 것. 여기서 연출과 사진을 따로 떼어 놓으면 연출사진이 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연출사진은 현대사진에서 중요한 자기표현의 방법론이며 형식논리를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연출 자체는 어떤가. 연출은 일종의 유사현실 내지 대체현실을 매개로 감각적 현실 내지 현실 자체를 간섭하고 대리하는 과정을 통해서 궁극적으론 현실 인식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예술의 중요한 실천논리로 인정받고 있다. 연출사진만으로도 이미 작품 아님 현대미술에 요구되는 자격이랄지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왜 굳이 사진을 회화로 옮기는 것일까. 사진만으론 뭔가 부족한 것일까. 여기서 사진을 캔버스에 확대해 그린다는 대목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사이즈가 커지면 느낌의 강밀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사진을 회화로 옮긴다고는 해도, 사실은 사진 그대로를 옮길 수는 없는 일이다. 더욱이 사진과 회화는 비록 하나같은 실재감과 실물감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엄밀하게는 질감도 다르고 색감도 다르고 정감도 다르다. 여기에 사진을 회화로 옮기는 것은 지난한 노동이 요구되는 일이다. 작가는 바로 그 지난한 과정이 예술을 통해 자기를 찾고 나아가 자기를 치유하는 과정에 흡사하다고 본다. 자기수행? 그래서 굳이 사진을 회화로 옮겨 그린다. 정리를 하자면, 연출을 통해 현실인식에 개입하고 간섭한다(현실과 현실인식은 다르다). 그리고 회화를 통해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인 개입과 간섭, 그리고 그 과정과 흔적에 실체를 부여하고 몸을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연출과 사진과 회화가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 어우러지면서 특유의 긴장감이며 아우라를 발생시킨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상황을 어떻게 연출하는가. 그리고 그 연출은 어떤 유의미한 의미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작가가 연출한 상황을 보면, 연출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의외의 소재와 만나진다. 속이 비쳐 보이는 투명 비닐 소재다. 작가는 이 비닐 소재로 사물을 감싼다. 이까지만 놓고 보면, 비닐 소재로 책이며 카터 등 사물을 감싼 크리스토의 초기 작업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그렇게 감싼 사물 오브제를 노끈으로 묶으면 영락없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작가의 개념은 다른 데 있었다. 그렇게 감싼 비닐을 해체해 다시 원형 그대로를 복원한다. 그러면 사물은 온 데 간 데 없고, 사물의 흔적만 남는다. 그 흔적이 흡사 사물의 껍질을 떠올리게 하고, 사물이 벗어놓은 허물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작가는 의자의 흔적이며 신발의 허물을 제시하고 있었다. 작가의 관심은 바로 이 지점에 있었다.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지점이며, 한때 존재했었음이라는 과거형으로만 기술될 수 있을 뿐인 존재의 흔적을 기록하는 일에 있었다. 그렇게 작가는 일종의 사물 초상화를 제시하고 있었고, 사물의 흔적이며 허물이 불러일으키는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어떤 감각지점을 건드리고 있었다. 인식론보다는 존재론적인, 개념보다는 감성이 오롯해지는 쪽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사물의 형태를 떠올리게 하지만 사물과는 다른, 사물의 외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정작 사물은 없는, 다만 흔적을 매개로 지금은 부재하는 사물을 증명할 뿐인, 그런 기묘한 오브제를 통해 작가는 사물이 존재하는 또 다른 지점을 열어놓고 있었다(사물이 존재하는 지점은 많다. 인식론의 그물에 걸린 사물의 존재태는 다만 그렇게 허다한 지점들 중의 한 지점일 뿐).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일정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는 다만 형식실험의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 성과를 완성하기 위해선 좀 더 다른, 좀 더 뚜렷한(?) 무엇인가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진 것이 비닐봉지다. 작가는 언젠가 우연히 비닐봉지에 눈이 갔다. 그리고 그 비닐봉지가 꼭 자기 같다고 느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뭔가를 담았었을, 지금은 빈, 비닐봉지와 자기를 동일시한 것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라고는 했지만, 사정은 많이 다르다. 전작에선 여하튼 의자며 신발과 같은 존재의 흔적이 또렷했다. 모르긴 해도 비닐의 성분도 좀 더 견고했을 것이고, 그 견고한 성분 탓에 존재의 흔적을 좀 더 또렷하게 복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닐봉지에 이르면 사정은 달라진다. 도대체 뭘 담았었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물을 담았을 수도 있고, 과일이며 채소를 담았을 수도 있고, 종이 곽 형태의 무언가를 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심정적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무슨 말인가. 전작이 개념 전달에 성공하고 있다면, 근작에서의 비닐봉지는 상대적으로 더 암시적이고 그 생리가 그림에 가깝다. 전작이 개념적이라면, 근작은 더 그림다워졌다. 하이데거 식으론 존재의 존재다움이 더 부각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말하자면 전작에선 여하튼 의자며 신발과 같은 사물이 먼저 왔다면, 근작에선 비닐봉지 자체로서 다가온다. 비닐봉지의 비닐봉지다움이 강조되고 부각된다는 점에서 진정한 사물초상화로 부를 만한 경지를 열어놓고 있다. 사물개념이 오리무중에 빠지면서 오히려 더 암시적이고 회화적이게 된 경우이며, 사물개념에 부수되던 소재(비닐봉지)의 위상이 강조되면서 소재 자체가 부각되는, 그런 차원으로 이행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사물에 내어준 위상을 되찾고 마침내 그림의 메인으로 들어온 비닐봉지는 무슨 말을 걸어오고 있으며, 어떤 종류의 감성을 건드리는가. 봉지의 봉지다움이 강조되고 부각된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가. 한갓 사물은 언제 무의미에서 유의미로 건너가고, 어떻게 유의미한 의미체로 거듭나는가. 꽃을 꽃이라고 불러주기 전에 꽃은 그저 막연한 무엇에 지나지 않았다고, 김춘수의 시는 적고 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명명한다는 것, 본다는 것, 걔와 눈을 맞춘다는 것에 의해서만이 비로소 세상은 존재하게 되고 생기를 발하게 되고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 전에는 모조리 한갓 추상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았다. 추상적인 개념을 살과 피가 흐르는 생기발랄한 무엇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 그래서 다름 아닌 나에게 의미 있는 그 무엇인가로 재생되게 하는 것, 그것이 아니라면 세상은 결코 존재하지도 태어나지도 않는다. 꽃이 그럴진대 비닐봉지는 말할 것도 없다. 비닐봉지에 눈을 맞춘다는 것, 비닐봉지에서 존재의 흔적을 냄새 맡는다는 것, 비닐봉지에서 존재의 비의를 캐낸다는 것, 그리고 특히 빈 봉지에서 연민을 느낀다는 것, 그것은 바로 추상적 개념으로 코팅된 개념의 더께를 걷어내고 사물(존재) 자체를 구제하는 행위이며 세계를 구제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게, 말하자면 사물초상화에 내재된 아님 은폐된 의미일 것이고, 작가의 비닐봉지 그림은 바로 그 의미를 건드린다(캐낸다?). 그렇다면, 그렇게 캐내진 의미는 뭔가. 비닐봉지에는 분명한진 않지만, 뭔가가 담겼던 사물의 흔적이 남아있다. 손으로 움켜쥘 때 생겼을 잔주름이며, 부분적으로 팽창된 볼륨이, 그리고 사물이 담기면서 늘어졌을 흔적들이다. 이 흔적들은 한마디로 빈 봉지에 원래 사물이 담겼었음을 증언해준다. 이처럼 흔적으로 남은 빈 봉지가 공수래공수거의 전통적인 삶의 전언을 떠올려준다. 공수래공수거 곧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삶은 어쩜 저마다 빈 봉지 하나씩 가지고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봉지 옆구리 터지는 줄도 모르고 이것저것 되는대로 주어 담는 그리고 때론 말 그대로 끌어 모으기에 급급한, 그런 우매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담긴 봉지의 내용물을 근거로 서로를 평가하고 재단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봤자 죽을 때는 내용물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도 흔적은 남는다. 그저 덧없는 욕망의 흔적과 서로 상처 입고 상처 입힌 난타의 흔적들이다. 그렇게 삶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고, 빈 봉지로 왔다가 재차 빈 봉지로 되돌려진다. 그 서양화 버전으로 치자면 바니타스 정물화가 여기에 해당한다. 보기에 좋고 먹기에 좋은 것은 다만 빈 봉지처럼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은 다만 빈 봉지처럼 죽음의 그림자에 지나지가 않는다. 욕망은 결여와 결핍이 본질이다. 욕망은 삶에 들러붙어있는 죽음의 메신저다.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호시탐탐 상징계를 위협하는 실재계의 잠행이고 매복이다. 그렇게 빈 봉지는 무상함을, 허상을, 죽음을, 그러므로 해골을 표상한다.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흑과 백의 대비가, 무슨 심연과도 같은, 칠흑 같이 새까만 배경화면과 표면에서 반짝이는, 꽤나 감각적으로 하늘거리는 빈 봉지와의 대비가 그 표상을 강화시켜준다. 그리고 작가의 봉지 그림은 일종의 사물 풍경화를 예시해준다. 세로보다는 가로로 긴 그림들이 그런데, 칠흑 같은 바다를 배경으로 흰 포말을 일으키며 자잘한 조각들로 부서지는 파도가 끝도 없이 펼쳐진, 아님 달빛으로 은근한 백사장이 끝도 없이 펼쳐진, 그런 일종의 유사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칠흑같은 화면은 꽤나 암시적인데, 그 자체가 심연의 메타포 같고, 막막한 우주의 메타포 같다. 작가의 사물 풍경화는, 보기에 따라서 그런, 원형적 바다 앞에 서게 만들고, 마치 우주를 떠도는 빈 봉지와도 같은, 그런 절대고독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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